
언젠가 당신에게 꽃다발을 (하)
- 태오x오를리
솔직히 말해서, 태오는 실베스타의 아내가 말했던 꽃다발의 마법이 썩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저 동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를리와 타카를 데리고 빛의 신전에서 거행될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을 뿐이었다. 만약 청첩장을 받았을 때 오를리가 자신과 떨어져 지내게 된다면, 그때는 오를리를 찾아가 동행을 부탁하겠다고 미리 마음을 정해두고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파괴의 힘을 정화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뒤, 태오는 세상에 펼쳐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긴 세월 동안 여러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책감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기에, 모험에서 있었던 일들을 추억하려는 감정을 스스로 터부시했다. 동료들의 결혼식과 꽃다발에 대한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기나긴 전쟁을 치르는 동안, 태오는 옛 동료와의 약속을 차차 잊어버렸다.
한 소년과 소녀의 여정에서 시작되어 세상의 운명마저 결정지은 오랜 전쟁이 끝나고 둥지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태오는 자신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다. 태오는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그리워하며 그날의 결혼식을 회상하다가, 문득 신부의 꽃다발에 깃든다는 마법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며칠 뒤, 태오의 궁금증은 저절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바로 오늘, 태오는 신부의 꽃다발을 받는 사람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다.
“가깝게 던질 테니까, 반드시 한 번 만에 받아야 한단다.”
오를리의 말에 카린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던져만 주세요. 전 준비가 다 되었어요.”
천상의 계단에는 나이트크로우의 단원들이 광장이라고 부르는 넓은 구역이 있었다. 무너진 대리석 기둥과 난간만이 덩그러니 놓인 황폐한 장소였지만, 오늘은 완벽히 수리된 기둥과 난간을 흰 꽃들과 하얀 시폰 천으로 장식한 우아한 결혼식장으로 탈바꿈되었다. 태오는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결혼 드레스를 입은 오를리가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카린에게 결혼식 꽃다발을 던져주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꽃다발을 던져주기 전에, 오를리는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신랑과 함께 결혼식장에 들어선 때부터, 오를리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부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눈물을 참았지만, 신랑이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다.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오를리는 황급히 객석을 등지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떨면서 흐느끼는 신부의 뒷모습에서, 오랜 세월 오늘 같은 날을 그저 상상하기만 했을 신부의 설움과 기쁨이 하객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장내는 삽시간에 숙연해졌고, 신부가 진정할 때까지 결혼식은 잠시 중단되었다.
태오는 자신의 오랜 동료를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평소 오를리를 진정시킬 때 쓰는 방법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용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뒤에서 몰래 다가온 칼 헤론이 태오의 등을 앞으로 힘껏 떠밀자-그가 오를리의 우는 모습에 잔뜩 정신이 팔린 바람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태오는 휘청대며 뛰쳐나가는 자신의 몸이 오를리에게 부딪치기 직전, 오른손을 뻗어 자신을 돌아보는 여자를 습관처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때까지 손도 잡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신랑과 신부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결혼식장 여기저기에서는 야유 섞인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변에서 일어난 소란을 모른 척하고, 태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품 안의 여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느닷없는 소동에 놀란 오를리는 눈물을 그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오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오랜 동료에서 인생의 배우자가 된 두 사람은 말없이 웃음을 띤 뒤, 동시에 눈을 감은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반지 교환 뒤에 으레 이어지는 절차를 빠르게 치러냈다.
정해진 결혼 절차를 모두 마친 뒤, 오를리는 자신의 꽃다발을 미리 약속한 대로 카린에게 던져주기로 했다. 카린의 뒤에는 카린의 약혼자인 에반이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우린 에반에게 원치 않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어. 게다가 그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이번 전쟁으로 이 세상은 멸망하고 말았을 거야. 그러니까 내 꽃다발은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시로 그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 신부의 꽃다발을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반드시 맺어진다고 하니까 말이야.
오를리의 생각에 태오는 두말할 나위 없이 찬성했다. 그러고는 먼 옛날 에반의 어머니가 자신의 ‘정식 결혼식’에 오를리를 초대해 꽃다발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물 자국을 완벽히 닦아낸 오를리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카린을 등지고 섰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청혼했던 날부터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오늘까지, 태오는 오를리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깊은 미안함을 느꼈다. 기약 없이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늘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마지막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친구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어떻게든 맺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는지, 태오는 뒤늦게 절감했다. 그런 용기를 냈으면서도,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버린 친구의 선택은 그래서 더욱더 아쉽고 안타까웠다.
다행히 실베스타의 아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다가오는 오월, 실베스타의 아들은 세상의 운명과 맞바꿔가며 찾아 헤맸던 여성과 자신들의 모험을 시작했던 신비의 숲에서 많은 축하를 받으며, 더없이 행복한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태오를 포함한 나이트 크로우 일원들도 그 결혼식에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나, 둘, 셋! 던져요!”
하객들의 구령에 맞춰 오를리가 어깨 너머로 던진 꽃다발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펼친 카린의 양손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오를리의 꽃다발을 받아든 카린은 뒤에 서 있던 에반을 돌아보았다. 둘은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웃으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를리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 태오의 곁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결혼을 서두르는 게 맞았어. 하마터면 먼저 결혼한 제자에게 결혼하라고 재촉받는 스승이 될 뻔했잖아.”
“그런 체면 때문에 일정을 앞당기자고 한 건 아니었다.”
“뭐?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말했잖아.”
“그때는 달리 떠오른 말이 없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아니, 잠깐…. 왠지 알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던 오를리는 곧 두 뺨을 짙게 붉히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결혼식 준비하는 동안 태오도 나와 똑같은 기분이었던 거지?”
“흠….”
태오는 오를리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제법 긴 시간을 살아온 태오였지만, 난생처음 치르는 결혼식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과 형식만 갖춰서 결혼하는 것뿐이니, 결혼식 당일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면서, 태오의 마음속에는 예상치 못한 온갖 불안과 기대가 일어나 느리게 가는 시간을 점점 답답하게 여겼다. 어느 날 밤에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가 영원히 못 볼 뻔했던 예전 일들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예복과 결혼식장을 준비하는 과정 따위는 거추장스럽기 그지없었다. 결혼할 때까지 상대방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나이트엘프의 관습을 하프엘프인 자신이 왜 따라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귀찮은 예식을 해치우고 싶었다.
결국 결혼을 약속하고 한 달이 다 될 무렵, 태오는 오를리에게 결혼식 날짜를 앞당기지 않겠느냐는 말을 무심결에 꺼냈다. 자신에게 당혹한 태오는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듯한 말투로 자신들보다 2주 앞선 제자의 결혼 예정일 때문이라고 서둘러 둘러댔다.
오를리는 태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최대한 앞당길 수 있는 기간을 의논했다. 가이아의 일반적인 결혼식에 비해 준비할 일이 적은 덕분에,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석 달 만에, 태오의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하는 에반보다는 두 달 앞선 시기에 식을 치를 수 있었다.
예전에 태오는 동료들이 왜 그렇게 서둘러 결혼하려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때 동료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태오의 웃음기 어린 얼굴에, 정답을 맞혔다는 걸 확신한 오를리는 행복에 겨운 눈빛으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때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태오는 빨리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을 서두르자는 게 아닌데, 나 혼자만 그런 것 같아서 다음 날 다시 미루자고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거든.”
“상관없었다. 다음 날 네가 마음을 바꿀 때를 대비해, 그 날밤 확실한 구실을 몇 가지 더 준비해두었으니까 말이다.”
태오는 오를리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오를리는 웃음을 풋 터뜨린 뒤, 꽃다발을 던져 주고 비어 있던 왼손으로 태오가 내민 손을 잡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