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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당신에게 꽃다발을 (상)

- 실베스타 부부

속 호숫가에는 커다란 여신상이 제단 앞에 나란히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제단 앞에 선 남녀는 상대방과 가까운 쪽의 손을 서로 맞잡고, 제단 위에 놓인 서약서를 함께 소리를 내 읽고 있었다. 빛의 신과 하객들에게 자신들의 결혼을 선언하고, 자신들이 부부로서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었다. 태오는 그들로부터 열 걸음 정도 뒤떨어진 곳에 있는 참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공터에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의 높고 굵은 줄기와 이파리가 무성한 가지들은 숲속 결혼식장의 기둥과 지붕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예복을 구하지 못해 평소 입고 다니는 옷에 꽃을 장식했다. 신부는 머리를 덮은 면사포 위에 치자꽃과 흰 장미로 꾸민 화관을 썼고, 왼손에는 치자꽃, 석죽과 흰 장미를 한데 묶은 꽃다발을 들었다. 신랑이 걸친 붉은 겉옷의 오른쪽 가슴팍에는 탐스러운 치자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숲속 호숫가의 결혼식장은 원래 호수 건너편 마을 사람들이 집회장으로 쓰던 장소였다. 암흑의 무덤과 용의 유적지를 분리하는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마을은 산 밑 지역과 교류가 거의 끊어진 탓인지 풍습이 자유로웠다. 주례를 서 줄 사제나 증인들의 서명이 들어간 공증서 따위는 이곳의 결혼에 필요하지 않았다. 호숫가에서 낭만적인 결혼식을 올리려던 연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서 정한 ‘공식 결혼 절차’를 밟을 수 없게 되자 당황했다. 하루라도 빨리 부부로 지내고 싶었던 두 사람은, 파괴의 힘을 정화한다는 목적을 이룬 뒤 테라 왕국에 있는 신전에서 ‘정식 결혼식’을 치르고, 지금은 마을의 관습에 따라 호숫가의 여신상 앞에서 ‘약식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아스드 사람인 태오의 또 다른 동료는, 말이 좋아 ‘약식’이지 실은 테라 왕국에서 인정받기 힘든 ‘비공식’ 결혼이지 않냐고 지적했다.

태오는 이 비공식 결혼의 몇 안 되는 하객이었다. 동료 중에는 평소 신랑 신부와 사이가 좋았던 두 명이 더 참석했다. 신랑과 신부는 사이가 나쁜 동료들도 초대했지만, 싸늘한 조소와 함께 당분간 다른 영지에 가 있겠다는 거절의 답변만 돌려받았다.

태오는 결혼식 초대에 응했지만, 내심 동료들이 결혼을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모험을 마친 뒤에 결혼식을 올려도 늦지는 않을 텐데, 젊은 인간 동료들은 열렬한 사랑에 빠져 평소의 분별력이나 인내심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객석에는 신랑과 신부가 속한 일행이 암흑의 무덤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구해 낸 마을 사람과 그의 가족들도 앉아있었다. 그들은 오늘 새벽 숲을 돌아다니며 꽃을 따 신부의 화관과 꽃다발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허름한 집에서라도 괜찮다면 피로연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신랑과 신부는 그들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는 뒤로 돌아 객석 주위로 다니면서, 하객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열 명도 되지 않는 하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랑과 신부를 축하한 뒤, 마을 안에 준비된 피로연장으로 향했다. 객석에 있던 하객들에게 인사를 마친 신랑 신부는 다시 몸을 돌려 객석 앞과 여신상 사이의 공간 구석에 있는 참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참나무에는 그들의 절친한 동료가 상체를 기대고 서 있었다.

신랑이 마지막으로 남은 하객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결혼식에 와줘서 정말로 고맙네, 태오.”

“친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에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나무에서 몸을 뗀 태오는 갓 결혼한 부부와 마주 서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보다, 실베스타. 네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가?”

태오의 질문에 실베스타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노발대발하셨지. 두 번 다시 집 안에 발을 들일 생각은 말라시더군.”

실베스타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

“아버지는 워낙 성미가 불같거든.”

“하나뿐인 아들이 빛의 기사 자리를 내던지고 모험을 떠난다며 소식을 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아버지라도 화를 낼 거야.”

아내의 말에 실베스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약 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하신다고 해도 상관없어. 테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빛의 신전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리겠어.”

실베스타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실베스타. 난 아버님이 우릴 인정해주실 거라고 믿어.”

신부는 다정하면서도 자신 있는 말투로 신랑을 달랬다.

“맞아. 아버지도 널 직접 보면 금방 좋아하시게 될 거야.”

아내의 미소에, 실베스타도 덩달아 씩 웃어 보였다.

“너희 둘이라면 아무리 완고한 아버지라도 설득할 수 있겠지.”

신랑과 신부의 대화를 지켜보던 태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태오 님의 격려도 받았으니까, 반드시 아버님께 인정받고 빛의 신전에서 멋진 결혼식을 올리겠어요.”

신부가 태오에게 말했다. “그러길 바란다.”

“그리고, 태오 님도 앞으로 행복해지셔야 하겠죠. 이 모험이 끝나면 태오 님도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바로 들려주실 거죠?”

“좋은 소식? 내가 말인가?”

태오는 눈을 껌벅였다.

“그래요. 태오 님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있잖아요. 가끔 전서구가 가져오는 편지의 주인 말이에요. 오를리라는 이름이라고, 실베스타에게 들었어요. 아스드 출신의 마법사지만, 지금은 태오 님의 고향에서 지내고 있다면서요?”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오를리는 나와 함께 싸우던 동료인데, 사정이 있어 내 고향에 머무르는 것뿐이다.”

신부는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태오 님이 편지를 받았던 때를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요. 거울이 있다면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정도였어요. 어찌나 편지가 뚫어지도록 바라보시던지….”

“네가 착각한 거다.”

“그런 착각은 하지 않아요. 사정이 있어서 태오 님의 고향에서 지낸다지만, 태오 님은 그런 사정을 불편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아닌 건 아니니까.”

태오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도, 신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말씀해주세요. 그 오를리라는 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오를리 말인가?”

태오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고향을 떠나던 날, 끝없는 성벽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던 일이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떠올랐다. 오를리는 한 손에 양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타카의 손을 잡고 자신을 배웅했다. 다른 대륙의 낯선 지방에서 아이와 단둘이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여간 외롭고 불안하지 않았을 텐데도, 아이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걱정되는 건 아이만이 아니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복잡한 감정을 감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아이를 잘 부탁한다.’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태오는 입을 열고, 천천히 말을 골랐다.

“말했지만, 예전에 달빛의 섬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다. 줄곧 날 도와주었고, 지금도 그렇지. 고마운 사람이다.”

“그리고 어떤 성격이죠? 조용한가요, 활발한가요? 마법사니까 영리하겠죠?”

“대체 왜 그렇게 오를리에게 관심이 많은 건가.”

태오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우린 쭉 친한 동료로 지냈잖아요. 그런데 태오 님은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질 않으시니까, 궁금해질 수밖에요.”

“….”

태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성격 정도는 말해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혹시 그분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다가 숨겨둔 감정이 드러날까 봐, 말하는 걸 꺼리시는 건 아니겠죠?”

태오는 찌푸린 얼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침묵을 고수했다.

고집스러운 정적이 계속되자, 대답을 기다리던 신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더는 물어보지 않겠어요.”

태오는 굳어진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좋겠군.”

“대신, 제게 한가지 약속해주셨으면 해요.”

“뭐지?”

“이번 모험이 끝나고, 저와 실베스타가 빛의 신전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릴 때는 태오 님이 그 오를리라는 분과 함께 우리를 축하해주러 오셨으면 해요.”

“너희에게 초대장을 받으면, 오를리에게 바로 말해두지.”

태오는 자신의 대답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모험을 마치고 고향에서 동료들의 청첩장을 받을 때나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나, 오를리가 언제나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이 상상했기 때문에, 함께 결혼식에 와 달라는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다는 걸 태오는 뒤늦게 자각했다.

파괴의 힘을 정화한다는 목적에 줄곧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 탓인지, 태오는 정화가 성공한다면 자신은 그 뒤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겔리두스를 봉인하고 실베스타와 함께 파괴의 힘을 정화하기 위해 귀향을 늦추었지만, 자신은 이번 모험을 마친 뒤에는 더 지체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오를리와 타카를 보게 될 것이다. 오를리의 편지에는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과 재회할 때쯤, 타카의 체격과 검술 실력은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오를리는-? 오를리가 언제까지 아이사에 머물러 있을지는 태오도 알 수 없었다.

오를리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그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언제 갑자기 바뀔지 알 수 없었다. 오를리라고 해서 예외가 되리란 법은 없었다. 타카에게 어른의 보호가 꼭 필요하지 않을 때가 되면, 오를리는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아스드 대륙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좋아요. 저는 잊지 않고 초대장을 보낼 테니까, 두 분은 우리 결혼식에 함께 와 주세요. 그럼 제가 태오 님과 함께 오실 분에게 제 꽃다발을 드리겠어요.”

신부는 꽃다발을 들어 태오에게 건네는 시늉을 했다.

“꽃다발을?”

“네, 그래요. 신부가 든 결혼식 꽃다발에는 신비한 마법이 깃든답니다. 오를리라는 분이 그 마법을 받아주셨으면 해요.”

“특별한 마법인가? 오를리는 마법사니, 마법이 깃든 꽃다발에 관심이 있겠군.”

태오의 대답에, 실베스타의 아내는 웃음을 풋 터뜨렸다.

“꼭 그분을 데리고 오셔야 해요. 그때, 이 꽃다발이 지닌 마법의 정체를 알려드리겠어요.”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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