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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그니 레이첼은 결혼한다.

​-아일린x레이첼x바네사

 

녀와 절친한 사이인 아일린 또한 레이첼의 친우이자 ‘침묵의 광산’의 여제로서 자리에 참석했다. 식의 시작을 기다리면서, 아일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합석할 상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두 테이블 앞의 세븐나이츠 제이브와 스파이크는 피로연 요리에만 관심 있어 보였다. 또 다른 세븐나이츠 동료인 크리스는 그녀와는 조금 떨어진 구석에 앉았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그녀는 그와는 합석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식장 안에는 그들을 제외하면 아일린은 안면이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옷차림으로 미루어볼 때, 하객에는 테라의 엘리시아 여왕이, 아이사의 린 황제가 보낸 하객들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일린은 계속 말을 붙일 사람을 찾았으나 하객들은 하나같이 바빠 보였다. 저들끼리 근황을 묻는 그들에서 초면임에도 기품과 고상함이 느껴졌다. ‘아그니아의 귀족들이겠구나,’ 그들과 친분이 없는 아일린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일린은 홀로 앉아 레이첼이 "나 곧 결혼한다."라며 쓴웃음을 짓던 몇 달 전을 회상했다. 오랜만에 셋이 모였다고 기뻐했던 것도 잠시, 그 말을 들은 아일린은 어두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옆자리 바네사가 영민하게 눈치를 준 덕에 겨우 평소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었다. 레이첼은 평소보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머쓱하게 그 상대가 아그니아 귀족의 외아들이라고 밝혔다. 귀족 간의 화합을 종용하여 아그니아의 번영으로 향하는 친선 정책의 일환. 그 중심으로 영주인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레이첼은 급작스러운 결혼을 그렇게 설명했다.

 

‘관혼상제 중 하나를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짓는다고?’ 그러나 매일 저급한 오크나 몬스터 따위와 상종하며 사는 아일린은 그러한 귀족 문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막무가내 결혼을 말리고 싶어졌지만, 당혹감에 입을 뗄 수 없었다. 아일린은 눈짓으로 바네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바네사는 무덤덤했다. 귀족끼리 통하는 게 있었는지, 두 사람은 무어라 한참을 이야기했다. 입술을 짓이기며, 아일린은 조금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자리 비었니?”

 

누군가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일린에게 말을 걸었다. 바네사였다. 그녀는 북적북적한 식장 안을 쓱 바라보더니 아일린에게 ‘외로웠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완전히 생각을 읽혔군, 아일린은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식의 지루함은 긴장한 아일린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회자-아일린과는 역시 초면이었다.-가 나와 귀족들에게 환영과 감사를 표하고, 저들끼리 농지거리를 해댔다. 아일린에게는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감싸고 신랑이 입장했다. 아일린 또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경을 기울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레이첼과는 동갑. 눈치는 조금 없지만 싹싹하고 구김살이 없어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성격. 온실 속 화초 같은 그 남자는 들뜬 기색을 감추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가 행복하다는 것은 뒷자리에 앉은, 눈치가 그다지 좋지 않은 아일린조차 알 수 있을 만큼 태가 났다. 그 뒤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레이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참을 때, 아일린은 차라리 접시에 얼굴을 처박고 싶다고 생각했다. ‘화장한 레이첼을 보는 것이 몇 년 만이던가?’ 머리에는 매일 쓰던 모자 대신 하얀 면사포가 얹어져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좋아하는 피자와 맥주를 입에 대지 않던 몇 주 전의 레이첼을 생각하다, 아일린은 고개를 떨궜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겉치레인데.”

“그래서 더 대단한 거지.”

 

아일린은 최대한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리려 애썼지만, 바네사에게 들린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레이첼이 테라 왕국을 보고 뭘 배웠겠어?" 말문이 턱 막혔다. 바네사는 아일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참 기특한 영주이지 않니?”

 

내가 레이첼을 말리지 않은 이유야, 그게. 아일린은 친구의 진심을 전해 들으며 그녀 자신만 아직 어린애인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조바심이 생겼다. 아일린은 바네사를 몰래 곁눈질했다. 바네사는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일린은 그저 그녀가 잦은 철야로 인해 집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에게 엘레나의 축복이 함께 하길….”

 

식은 금세 막바지에 이르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미소를 유지하느라 그쪽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가가 저릿저릿했다. 어차피 쇼윈도 부부인데… 돌연 불순한 생각이 아일린을 스쳤다.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이야. 우정 뒤에 숨은 사람의 최후란 이런 걸 텐데. 하객들의 축하는 너무 열띠어서, 식장 안은 후덥지근했다. 아일린은 조금 어지럽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들처럼 진실된 응원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망령처럼 떠도는 메아리에 귓가가 먹먹했다.

 

"축하해, 레이첼."

 

아그니 레이첼의 결혼식에서, 아일린은 웃으면서 울었다. 제 손에 끼워진 레이첼의 반지를 보며 한 번, 레이첼의 손에 끼워진 다른 사람의 반지를 보며 한 번. 그녀는 동료들과 떨어져 앉은 것에 안도했다. 입꼬리만 비틀려 올라간 어색한 미소. 누구든 그녀를 넋을 잃은 사람으로 볼 것이 분명했다. 이유 모를 바람이 그녀의 촉촉한 눈가를 덮쳤다. 눈가를 훔치며, 아일린은 일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손뼉을 쳤고, 자신의 지난 위선을 부정하듯 열렬히 친구의 행복을 빌었다. 그러나 곧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아일린의 옆자리.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었다. 바네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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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니 레이첼의 결혼식에서, 윈더링 바네사는 울면서 웃었다. 밀려오는 감정이 끝내 홍수처럼 범람했다. 흐릿한 시야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는 턱 끝까지 올라오는 답답함을 요란하게 토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레이첼은 평소보다 훨씬 눈부셨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은색 반지가 조명 빛을 반사했다. 한 때, 그것이 제 것이었기를 바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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