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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었던 한 때

​-델론즈

 

무도 없는 이 공간에 당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절로 웃음이 난다. 소리내어 웃음을 흘린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매번 그녀를 찾을 생각과 그녀와 함께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많은 일들을 벌였기에 몇 년이 지나도 더불어 수백년이 지나도 버틸 수 있었지만 행복을 담은 맑은 웃음만은 지을 수 없었다. 당신이 있기에 이런 웃음도 지을 수 있구나.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내 눈앞에서 눈을 맞추고 목소리를 내고 웃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기적이었다. 멍하게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는 귓가에 대고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정말이지 여전한 사람이다.

 

"델론즈! 듣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생각을 좀 한다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그 날에 못했던 걸 해요."

 

그 날 당신과 나는 늘 함께 했었지. 하지만 결국은 손을 놓쳐버리고 잊고 싶은 기억만 가득한 날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몇 번이고 절레이다가 이내 떠오른 것을 생각하며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의 방해로 이루지 못한 혼례식. 그리고 그 이후 그런 일이 일어났었지. 그럼 그녀가 다시 하고 싶은 것은 나와의 혼례인건가. 크게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도 누구보다 당신과의 혼례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을 갖고 살아가고 결국 함께 늙어죽는 것, 그것을 보고 당신과 나를 대입하며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지금은 그런 것보다 결혼식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 꽃들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웨딩드레스도 없었고 그에 걸맞는 턱시도도 없었다. 그녀와의 행복한 혼례를 위해서는 이것이 없으면 안 됐다. 혼례식 전 날 누구보다 신난 표정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당신의 모습이 생생하다. 누구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원했고 아름다운 것을 원하던 당신인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이 입고 왔던 흰 드레스를 보여주었다. 원래 수의는 흰색으로 입었었나.

 

당신은 그렇다고 해도 나는 제대로 된 의상이 아니었다. 찢긴 망토와 부딪혀 갈라지고 부러진 곳이 보이는 갑주. 그리고 완전히 흐트러진 머리카락. 혼례를 올릴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혼례와는 멀어지고 있는 나의 상태에 극구 사양했다. 좀 더 좋은 곳에서 깔끔한 옷을 입고 하고 싶었기에.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단호했다. 검지를 조용히 내 입 가에 가져다대더니 싱긋 웃었다. 당신의 웃음이면 어떠한 상황이라도 무너질 따름이었다. 나의 생각도, 또 나의 고정관념도. 싱긋 웃으면서 당신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끌어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녀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오랜만에 내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사랑스러운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아니,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나의 기사. 저도 시간이 필요했어요."

 

이 시간이 혼례를 올리지 말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필요한 시간이 아니었다. 좀 더 아름다운 혼례를 위해. 더욱 아름답게 둘이서 빛나기 위해 준비하는 자리라는 것을 서로서로가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서툰 손으로 화관을 만들었다. 아이에게 만들어주던 화관 만드는 법을 열심히 어깨 너머로 익혔었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꼭 내 손으로 해주고 싶었던 것이기에 더욱 두근거리는 자리였다. 화관을 쓰고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드레스를 입을 그녀가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무릎에 걸칠만한 길이로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서 있을 그녀를 상상하니 절로 얼굴이 벌개진다. 긴 드레스를 입은 당신도 잘 어울렸는데. 이런 드레스를 입은 당신도 정말 아름답구나. 열심히 화관을 엮어 만들었을 때 처음 만든 건 치고는 그럴싸하게 나왔다. 그녀를 생각하며 만들어서 그런가. 그러는 순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비슷하게 끝냈던 건가.

 

"이리와요. 전 준비 다 됐어요~"

"저도 다 됐습니다. 갑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서로 손에 들린 화관. 정말 같은 생각만 하는구나. 우리 둘은, 크게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내가 먼저 그녀의 머리 위에 화관을 올렸다. 행복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 역시 나에게 화관을 씌워주었다. 화관을 쓰고 환히 웃는 너는 내 상상 이상만큼 예뻤다. 초라한 나라도 당신이 올려 준 화관만 쓰더라도 누구보다 멋있는 사람이 될테지. 당신이 지었던 웃음을 잊은 적이 없다는 생각했는데. 당신의 웃음은 생각보다 더 빛나는구나. 이제 혼례를 올릴 준비는 되었다. 맹세는 이미 그 날에 했었다. 지금의 당신과 나는 아름다운 한 때를 즐기는 것, 그것이 최고의 혼례이리라. 드레스가 바람에 흩날리며 꽃이 함께 날린다. 이 공간을 만든 녀석이 그녀를 불러와줘서. 그리고 이 공간에 꽃을 피워줘서 정말 감사했다. 그를 위해서 뭐든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이런 마음을 이 공간을 만들어 준 녀석은 알까. 나는 눈앞에 당신에게 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짧게 청했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기꺼이 그러죠."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꽃밭에서 춤을 추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왈츠. 그녀는 누구보다 왈츠를 잘 추었다. 그 춤사위를 볼 때 정말 황홀하기만 했는데. 나도 이제 그녀와 함께 춤 출 수 있구나. 그녀와 함께 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누군가 볼 때 나 혼자 춤을 추고 있는거라도 눈앞에 그녀만 나에게 보인다면 상관 없었다. 수많은 피를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은 뭐가 중요하겠는가. 다만 난 손에 피를 묻힌 죄로 나는 깨끗하지 못했다.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르고 나에게 돌아 올 당신도 어쩌면 떳떳한 모습으로 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보고 싶었던 당신이 내 눈 앞에 올 것인데 그런 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상대가 당신이라면 난 다시 죄를 저지를테고 그녀에게 돌아가는 모든 죄는 다 내가 끌어안을 참이었다. 당신은 언제 저승으로 돌아갈 지 모르지만 이 순간이 행복했으면 됐다. 그리고 난 다시금 당신을 되찾을 노력을 할 것이다. 이런 허망한 공간이 아닌 현실에서 당신을 끌어안고 오늘 했던 일의 배만큼 당신과 이루어내리라. 다시금 언약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 즈음 이 왈츠는 곧 추억이 되겠지. 지금의 일은 당신으로 인한 괴로웠던 한 때가 아니라 당신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될 한 때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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